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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travel/Jeju

날씨같은 오늘::제주일기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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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시 반쯤 일어나 긴 명상을 했다. 손발이 통통한 어린 아기를 떠올리며 조건없는 사랑을 느꼈다. 아기처럼 우리도 존재만으로도 사랑이 흘러넘치는 사랑 그 자체다. 그래서 나는 조건없이 너를 사랑하고, 너의 행복을 바란다. 제주의 바다가, 지금 함께하는 유비와 J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도. 그래서 아침마다 감사일기를 쓴다. 사랑할 것이 너무 많아서 잘게 쪼개어 나누어야 한다. 명상도 하고 간단한 스트레칭도 하고 제주일기도 다 썼는데도 시간이 남아서 책을 읽다가 유튜브에서 드라마 도깨비 다시보기를 봤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데 오랜만에 보니 신선한 자극이 됐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고있는데 유비와 J가 일어났다.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애들아! 일어났구나! 기다리고 있었어!"라고 외쳤고, 애들은 아직 가시지 않은 잠결에 놀라 크게 웃었다.



J가 요거트를 만들어줬다. 유비가 내가 온다고 만들어 놓은 두유 요거트에 과일을 올리면 된다. 그런데 J는 한참동안 요거트를 준비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받아든 그릇에는 아주 얇게 저민 사과와 일일이 잘게 썬 데이프와 초콜렛이 예쁘게 올라가 있었다. 천천히 하나하나 섬세하게 쌓아 올리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만든 시간만큼의 정성을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배가 아주 불렀다. 난 이미 일어난지 5시간이 지나있었고, 친구들은 오래 기다린 나에게 미안해하며 외출을 서두르려고 했다. 난 여유를 부리는 것이 좋다며 좀 더 쉬다가도 좋다고 했다. 그렇게 낮잠을 좀 자고 유비가 코디해준 유비의 화려한 옷을 입고 나갔다.



비가 오는 제주는 아름다웠다.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 구경을 했다. 자연은 늘 거기에서 늘 새로운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주고 위로해준다. 자연 속에 있고 싶다고 제주에 살고 싶다고 하니까 유비는 제주로 발령받아 내려오라고 했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 바다 한켠으로는 햇살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유비는 제주 어디든 예수가 탄생할 것 같다고 했다.

작년 늦여름 비밀리에 다녀간 (제주일기10) 수월봉에 차를 타고 갔다. 수월봉에는 처음 가봤다. 그 근처에서 수영복도 안입고 대충 수영복인 척 스포츠브라와 속바지를 입고 수영을 하고 파도 앞에 앉아 파도를 맞은 적은 있었다. 그때의 파도와 그 파도가 줬던 즐거움,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한 소중한 유비를 떠올리며 추억을 회상했다. 바다는 우중충한 날씨와 아주 잘 어울리게 예뻤고 안개때문에 수평선이 흐렸다. 기온이 낮은 편은 아니었는데 햇빛이 없고 바람이 불어서 추웠다. 한바퀴 돌고 차로 돌아와 다시 해안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가다가 예쁜 바다가 보이는 곳에 차를 또 멈추고 바다와 부서지는 파도를 구경했다. 송학산 근처 바다고 들렸다. 몇년 전에 한번 온 이후로 두번째였다. 여전히 아름답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멈추고 자연과 오늘을 음미하며 어떤 바람이라는 동네책방에 갔다. 따뜻한 분위기의 책방에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한참 구경하며 책구경을 했다. J가 책한권을 골라 샀다.

차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초록빛 밭들을 보면서 나는 이상한 편견이 있는데 그건 제주의 채소들은 행복할 것 같다는 편견이라고 했다. 제주의 채소들은 왠지 행복할 것 같고, 그래서 밭을 보는게 즐겁다고 했다. 유비와 J는 재밌는 생각이라고 했다.



사계리 서점에 갔다. 장르물만 취급하고 책은 아주 적은 카페이다. 유비는 두유를 미리 챙겨가 밀크티를 주문했고, J는 홍차, 나는 카모마일 티를 주문했다.

카페에 자리를 잡는 사이에 큰외숙모께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큰외숙모는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대신해서 나의 할머니가 되어주신 분이다. 나는 큰외숙모를 너무 좋아한다. 그런 사람이 다들 있지 않나. 너무 사랑하는데 이상하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표현은 잘 하지 못한 그런 사람. 큰와숙모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생각하면 미소가 절로 나오는 사람이며, 자주 생각하지만 연락을 잘 못한다. 막상 연락하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무하고나 대화도 잘하고,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과는 한두시간은 우습게 통화하는 나조차도 그런 사람이 있다. 그래서 작년 연말에 큰외숙모께 편지를 쓰려고 했다. 근데 당시에 일도 힘들고, 이런저런 마음의 핑계를 대고 쓰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큰외숙모께 전화가 온 것이다. 다시 걸어서 잠깐의 통화를 했고, 큰외숙모의 문장 하나하나에 나에 대한 사랑과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픈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어색하게 대답하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문장으로 만들지 못했다. 근데 내 성격상 하고싶은 말은 해야한다. 그래서 다급하게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큰외숙모도 "나도 k사랑한다."라고 대답해주셨다.

아름다운 바깥 풍경을 보면서 책을 읽었다. 마음이 편안하고 차분했다. 유비는 엄청난 양의 밀크티를 한모금씩 계속 나눠줬다. 밀크티가 진짜 너무 맛있었다. 정성스럽게 끓인 티가 났다. 다음번엔 잠을 못자더라도 꼭 밀크티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비가 저녁에 수업이 있어서 서둘러 집에 가야했다. 집가는 길에 서점을 나서면서 사장님께 간단한 질문 몇마디를 드렸는데 유비가 너 또 사장님이랑 무슨 얘기했냐고 물어봤다.



가는 길에 유류유루에 가서 풀빵을 샀다. 유루유루 사장님은 풀빵이 비건인지 확실하지 않다며 고기와 같은 조리시설에서 제조된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래서 음식 성분에 동물성재료가 없으면 비건이 맞다고 그 정도면 비건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앞으로 비건 요거트라던지 더 비건친화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차에서 기다리던 유비는 내가 오자 "너 또 사장님이랑 친해졌지."라고 했고 나는 맞다고 대답했다. 유루유루에는 비건 카레를 파는데 깃든의 카레는 인도식이라면 유루유루는 일본식 카레라서 느낌이 다르고 둘다 너무 맛있다고 한다. 넘 먹어보고 싶었다.



풀빵을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와 유비는 먼저 서둘러 밥을 먹고 수업준비를 했다. 나는 갑자기 심란해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후회할 행동을 하고나서 피곤했는지 바로 쪽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니 J가 새송이버섯으로 무언가 만들어주겠다고 해서 기다렸다가 저녁을 먹었다. 버섯을 아주 예쁘게도 쌓아서 접시에 담아놨다. 밑에 깔린 양파와 함께 먹으라고 했고 아주 맛있어서 밥을 한그릇 더 먹었다. J와 유비는 번갈아가면서 수업을 하고 나는 책을 읽거나 도깨비 다시보기를 보면서 기다렸다가 수다를 떨었다.



유비의 쉬는 시간에 채담만두를 바닥은 튀기고 수증기로 쪄서 맥주와 함께 야식으로 먹었다. 채담만두 너무 맛있다. 반했다. 유비도 술을 잘 못마셔서 맥주 한캔을 둘이서 나눠먹고도 반이 남았다. 유비가 없을 때 J와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면서 놀았다. 행복한 하루가 저물어갔다. J가 밖에 별이 잘 보인다고 해서 옥상에 갔다. 안좋은 날씨에 구름이 듬성듬성 있는 와중에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구름과 뒤섞여 오묘한 분위기가 났다. 허리를 꺾고 난간에 기대어 한참동안 별을 봤다.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을까 궁금했다. 내 존재의 이유를 알고 싶어.

오늘 하루 동안 제주 날씨는 비가 내렸다가 해가 떴다를 반복했다. 제주의 날씨처럼 오늘 나에게 일어난 감정도 그랬다. 하지만 나의 본질은 끝없이 파란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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