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유비가 자면서 잠꼬대도 하고 이불을 발로 차기도 했다. 우리는 어젯밤부터 오늘 앤드유에 간다고 신나 있었다. 유비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면서 명상도 하고 일기도 썼다. 유비가 일어났고 시간이 좀 남았다.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산책을 했다. 어제보다 훨씬 덜 추웠다. 유비도 오랜만에 산책이라고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코앞이면서 안 나오다니 신기했다. 정말 제주도민 같아 보였다. 배고프지만 행복하게 귀여운 들꽃들을 구경하면서 산책을 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앤드유 카페에 갔다. 11시 오픈에 맞춰서 갔는데 준비 시간이 필요해 오늘은 1시에 오픈한다고 했다. 미리 인스타로 확인까지 했는데 확인하고 공지가 올라온 것이었다. 이틀 연속으로 가혹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앤드유 근처에 새로 생긴 것 같은 카페에 갔다.
나는 토마토 셔벗을 주문하고 유비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예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블로그 업로드를 하고 유비도 연재중인 글을 썼다. 그렇게 기다리던 시간이 되고 앤드유에 갔다.
제시간에 갔는데 더 기다려야 했다. 원래 음식점 근처에만 가면 고프지 않던 배도 고픈거다. 벽에 기대어 힘든 시간을 기다렸다. 벽에 기대고 있으니까 환풍구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겨우 앤드유에 들어가서 계획대로 일등으로 주문했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됐다. 스콘 등 디저트 준비가 안되어서 애프터눈티 세트 주문이 안된다고 했다. 못 먹어서 서러운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미 입꼬리가 바닥을 향해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앤드유를 먹을 수 있는 게 어디냐며 감사하다고 했고 유비도 똑같은 말을 했다.
탬페랩에 스프를 추가하고 비건 풀드포크 샌드위치에 감자튀김을 추가했다. 나는 금방 배가 불러서 조금씩 자주 먹고, 먹는 속도도 좀 느리다. 평소에는 괜찮은데 배가 많이 고프거나 먹고 싶은 게 있을 때 같이 먹는 사람이 배려해주지 않고 먼저 다 먹어버리면 속상할 때가 있다. 유비랑 뭘 먹을 때 가끔 그랬다. 그래서 그걸 말했더니 유비가 천천히 먹겠다며 자기 지금 천천히 먹고 있지 않냐며 칭찬해달라고 했다. 귀여웠다.
유비는 밥을 먹다가 당근마켓에서 빈티지 찻잔 세트를 구매했다. 판매자가 앤드유까지 찻잔을 가져다줬다. 유비는 충동구매했다며 후회했다.
행복하고 배부른 우리는 걸어서 협재 해변에 갔다. 유비는 제주에서 협재 해변이 제일 예쁘다고 했다. 나는 평대리 해변을 제일 좋아하지만 협재가 예쁜 건 인정했다.
메리오가닉 사장님의 어머니께서 운영하는 소품샵 런던 다락에 갔다. 메리오가닉스러운 분위기였다. 여기서 은반지 하나를 샀다. 계산할 때 사장님께 메리오가닉을 어제도 오늘도 다녀왔다고 자랑했다. 또 오겠다고 괜히 한번 말하고 가게를 나왔다.
그 바로 앞 너무 예쁘고 자본주의 냄새도 나는 빈티지샵을 구경했다. 내가 치앙마이에서 봤던 옷들도 있어서 반가웠다. 너무 예쁜 게 많아서 지갑이 홀쭉해질 뻔했다.
가게 구경을 하다가 금릉해변으로 갔다. 협재에서 금릉 가는 길이 너무 예뻤다. 또 흠뻑 행복했다. 날씨도 좋고 바다도 좋고 기분도 좋았다. 금릉 해변에서 뛰어노는 강아지와 아이들, 그리고 스냅사진을 찍는 예비 신혼부부를 구경했다. 예쁜 바다 구경을 실컷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나와 눈이 마주친 고양이가 야옹거렸다. 엉덩이를 쓰다듬어 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이 고양이와 한참을 놀았다. 크고 건강해보여 좋았다. 제주의 고양이들은 사람을 별로 안 무서워한다.
집에 유비가 산 찻잔 세트를 두고 메리오가닉에 갔다. 우리는 집에서 컵을 가져가 셀프바에서 커피와 캐슈두유핫초코를 마셨다. 마시는 건 핑계고 사장님과 수다를 떨었다. 나는 유리로 된 작은 종지와 키가 낮은 와인잔, 스무디 만들어 먹기 딱 좋은 컵을 샀다. 아 그리고 (런던 민박에서 비닐 포장이 되어있어서 구매를 포기했던) 사장님 어머니가 손수 뜬 책갈피도 포장이 없어서 샀다. (그리고 기타 등등을 샀다. ) 유비는 나를 설명하듯 내가 원래 뭘 살 때 신중한 애라고 사장님께 말했다. 그리고 물욕이 없는 애가 뭘 그렇게 샀냐고 신기해했다. 나도 내가 신기했다. 다 필요했고 우리집에 갈 운명이었던 거다.
유비는 나때문에 메리오가닉 사장님이 귀찮아하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제주에 자주 못 오니까 괜찮다고 했고, 유비는 사장님께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일주일 동안 안 오겠다고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강연에서 받은 책을 사장님께 드리고 싶었다. 결국 다시 가서 사장님께 그걸 드리고, 가게에 놓고온 줄도 몰랐던 내 가방을 가져왔다. 유비는 날 보고 한참을 웃었다.
유비가 1키로미터 떨어진 하나로마트에서 춘장을 사 오면 짜장면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혼자 노래를 들으며 다녀왔다. 하나로마트에서 고산국수도 팔았다. 고산국수는 제주에서만 그것도 고산의 시장에서만 살 수 있는 국수였다. 고산국수 완전 맛있다. 암튼 춘장을 사왔더니 유비가 고산국수 면으로 짜장면을 만들어줬다. 너무 맛있었다.
다 먹고 빈둥거리는데 유비가 선물로 접시를 줬다. 요즘 유비는 도자기 만드는 공방에 다니는데 그곳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보라색의 예쁜 마블링이 아름다운 접시였다. 이 색을 만들기 위해 3일동안 고생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아쉬람>이라는 인도영화를 봤다. 인도에서는 과부가 되면 머리를 밀고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천민이 된다. 그 과부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유비는 초반부터 대작의 냄새가 난다고 했고 나는 영화에 눈을 떼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마음이 먹먹했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 유비는 브라우니를 구웠다. 그 구운 브라우니를 수저로 퍼먹으면서 영화를 다 봤다. 그리고 밤에 자면서 유비는 나에게 자꾸 그림을 그렸냐며 "그림 그린다고 했잖아."라고 말했다. 서울 가서 시간 여유가 생기면 미술학원 다닐 건데 어떻게 알았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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