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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travel/Jeju

정크데이::제주일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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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지 한 시간도 안돼서 일어났다. 자기 전에 뭘 마시면 안 된다는 아빠의 말이 맴돌았다. 창밖을 보니 아주 검고 짙은 하늘에 달이 접시처럼 떠있었다. 이거 보려고 깼구나 혼자 좋아했다. 두어 번을 더 깨다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해가 쨍하게 떠있었다. 오늘은 밖에 나가지 않고 게으름을 즐겼다. 그래 봤자 8시도 아직 안된 시간이었다. 어제 s를 만나 나눴던 대화들이 꿈만 같았다.

 

 



몇 년 전 무작정 제주에 갔었다. 당시에 첫 임용시험에서 운 좋게 1차 합격을 했지만 최종 면접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졸업과 함께 백수가 되었다. 그때 갔던 제일 좋았던 카페에 혼자 갔다. 오후가 다되도록 ub는 일어나지 않았다. ub는 완전 채식을 하고 나는 채식 지향이라 그곳의 논비건인 당근케익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당근을 너무 좋아한다. 나는 당근케익 하나, 당근주스 하나를 시켜서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ub는 내가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며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그 작은 카페에는 손님이 많았다.

어떤 분이 내가 앉은 창가 자리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내가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는데 괜찮다며 편히 앉아있으라고 해서 그냥 신경 쓰지 않고 책을 읽었다.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 읽던 책을 다 읽어서 ub가 빈둥거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나왔다. 아까 사진을 찍겠다던 사람이 밖에 있었다.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정중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키도 크고 하얀 피부에 하얀 옷이 제주와 묘하게 어울리지 않아서 누가 봐도 여행 온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인 것 같았지만 나에게는 지나친 타자였다. 이름도 나이도 가치관도 모르는 사람과 친구는 될 수 있지만 연인이 어떻게 되는지 나름 유교걸인 나는 도무지 적응이 안된다. 무엇보다 내 안전이 보장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럴 때 예전에는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남자친구가 있는 경우에는 남자친구라는 존재에 기대어 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현실이 슬펐다. 남자친구가 없는 경우에는 (해코지당할까 봐) 무서워서 없는 남자친구를 있다고 거짓말하는 상황이 비참했다. 대낮의 탁 트인 바다 앞에서 나는 용기가 생겼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분은 예쁘게 웃으면서 누군지 모르겠지만 부럽다고 했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우연히 또 마주쳤는데 서로 모른 척했다.

 

 

 



집에 돌아오니 ub는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냉장고에 있는 자투리 채소를 넣고 라면을 끓여먹었다. ub는 드디어 첫 외출이라며 편의점에서 감자칩과 첵스를 사 왔다. 하루가 다 지나가는데 오늘은 정크 데이라고 우리 마음대로 컨셉을 정했다. 해가 지려고 해서 나는 일몰이라도 봐야겠다고 했고 ub는 나에게 그만 생산적으로 살자고 했다. 친구와 영상통화하면서 해가 지는 바다도 보여주고 노래도 부르고 바다에서 춤도 췄다. 친구와 전화를 끝내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서울이 코로나로 난리가 났다며 마스크를 잘 쓰고 다녀야 한다고 계속 말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아주 어두워졌다. 집으로 들어와 첵스와 감자칩을 번갈아 먹으면서(단짠단짠=진리) 영화를 봤다. 오늘도 뒹굴뒹굴 잘 놀았다.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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