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라는 게 아쉬워서 졸음을 억지로 참았지만 아침형 인간인 나는 1시를 넘기지 못하고 자버렸다. 그리고 아주 일찍 일어나서 창밖의 깜깜한 하늘을 보다가 눈을 감고 바깥의 생명들의 소리도 들었다. 3시에서 4시 사이에는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옅어진다. 4시가 넘어가자 닭이 새벽에 우는 것처럼 곤충들이 온 힘을 다해 울어댔다. 쟤들은 정말 빨리 일어나는구나 생각했다. 나 말고도 살아있는 존재가 많다는 게 좋았다. 다 같이 잘 살고 싶다. 매일 나 혼자 일출을 보러 갔어서 이번에는 같이 가서 보자고 ub와 약속했다. 그래서 5시 반 알람도 맞춰놨다. 훨씬 전에 일어나서 미리 짐을 싸고 여기저기 머물렀던 내 마음도 정리했다.
내가 자꾸 부스럭거려서 ub도 일찍 눈을 떴고 같이 바다로 나갔다. 바다 밑에 구름이 잔뜩 가라앉아있었다. ub는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처음으로 새벽에 일출보러 나왔는데 하필 구름이 바다를 감싸 안고 있다니. 그 상황도 웃겼다. 강아지풀이 바람을 따라 촐랑촐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강아지풀을 뜯어서 ub의 머리에 꽃아 서 안테나를 만들어줬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자꾸 무슨 얘기를 했다. "올라가서 내 안의 자연을 찾아봐야지. 제주는 늘 여기에 있으니까." 라고 했고 ub는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면서 "좋은 생각이야."라고 했다. 구름 위로 올라오는 태양이라도 보려고 했지만 구름도 같이 떠올라서 경쟁하듯이 태양을 가렸다. ub는 화장실이 가고 싶다며 먼저 집에 들어갔다. 나는 1분 단위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하면서 더 봤다. 해가 수면 위로 떠오를 때 그 바로 밑으로 황금빛이 줄을 만들어 광선처럼 비춰준다. 딱 그 위치에서 돌고래를 봤다. 처음에 잘못 본 줄 알았다. 고래는 세 번 더 올라왔고 내가 본 게 돌고래가 맞다는 확인을 해줬다. 그 어떤 선물보다 값진 광경이었다. 인간은 자꾸만 다른 종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데 저들은 어쩜 저렇게까지 아름답게 감동까지 주는 걸까.
집으로 돌아와서 나갈 준비를 했다. 미리 짐을 다 싸서 시간이 남아 괜히 눈썹을 그렸다. ub는 내 맨얼굴이 좋다고 했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더 잘 어울린다고 했다. (ub야 그건 내가 똥손이라 그래..) 평소에 화장을 하지 않는다. 교사가 되고 처음에는 열심히 하고 다녔다. 어느 날 나에게 무슨 섀도우 쓰냐면서 자기도 사고 싶다는 학생을 만난 다음 날부터 화장을 하지 않고 출근을 한다. 나는 내가 아이들에게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나라는 존재가 미미할지라도 아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가 있다는 생각을 화장을 통해 하게 되었다. 화장을 하지 않아서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문화가 내 민낯으로 조금이라도 희미해질 수 있다면 언제든 환영이다.
비행기 창가 자리에 앉아 시집을 읽다가 창밖을 구경했다. 이 아름다운 하늘 아래 광경을 자주 보는 조종사들이 부러웠다. 소중한 친구 k가 김포공항까지 마중나왔다. 코로나로 위험하니 오지 말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내가 너무 보고 싶다고 나와줬다. 우리 부모님도 안 해주는 걸(부모님은 내가 꽤 길게 외국에 있다가 돌아왔고 반드시 마중을 나와야하는 상황에서도 안 오신 분들이다.ㅋㅋㅋㅜㅜ 강하게 키워주셔서 감사❣) k에게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를 과롭게 하는 감정이 김포공항에 묻어있었고 빨리 벋어 나고 싶었다.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 상황도 아주 오랜만이니 그냥 행동은 하지 않고 마음은 내버려 두기로 했다. 서울에 돌아와 순식간에 일상으로 전환했다. k와 나는 침대에 누워 밀린 이야기를 하고 밥을 먹으면서 그것이 알고 싶다를 봤다. 낮잠도 늘어지게 잤다. 집에 오자마자 대견하게 잘 지내준 반려 식물들에게 듬뿍 물을 줬다. 다들 잘 지내고 있었구나 다행이었다. 이따금 제주에서 식물들이 목말라할까 봐 걱정하던 게 웃겼다.
여행의 끝이라는 아쉬움과 멈췄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설렘이 뒤섞였다. <판사유감>의 저자인 문유석 판사가 <쾌락독서>라는 책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목적지를 서울이 아닌 가고 싶은 여행지로 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이 시국에 비행기를 예약할 수 없지만 나도 마음이라도 이전 여행과 다음 여행 사이에서 스탑오버 중이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다음 여행을 꿈꾸면 지금 일상에서 쉽게 관대해진다. 나는 이번 여름방학의 제주 여행과 다음 제주 여행 사이를 서울에서 스탑오버 중인 셈이다. 이 삶이라는 여행도 어쩌면 스탑오버일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나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잘 몰랐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솔직할 수 있었다. 제주의 아름다움과 ub가 주는 편안함 덕분에 가능했다. 내 이름의 한자 뜻은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갖추다'이다. 이 뜻은 제주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제주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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