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로 사귄 친구 자윤이는 아침 일찍 비양도에 가자고 해놓고 아주 잘 자고 있다. 그래서 자윤이를 기다리면서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유비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 제주에 머물면서 유비와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아름답고 소중하다. 그 이후로 유비는 나에게 그냥 존재만으로 편안함을 주는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번 주말에 갑자기 제주도에 가고 싶었고 유비는 이번 주말에 바쁠 예정이었다. 가을의 제주를 가고 싶었다. 혼자 한라산에 가려고 했다. 유비집에서 한라산은 멀어서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한라산을 갔다가 유비에게 가려고 했다. 목요일에 비행기표를 샀다. 그리고 그날 밤 요가 수련을 하다가 발가락을 다쳤다. 크게 아픈 건 아니었는데 피가 많이 났다. 피를 닦고 밴드를 붙이고 남은 수업을 듣는데 피가 계속 나서 요가 매트에 피가 여기저기 묻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새로운 해드스텐딩 동작을 연습해보다가 그렇게 됐다. 다쳤으니까 원장님은 그 동작을 하지 말고 넘어가라고 했다. 뭔가 다시 해보고 싶어서 그냥 해봤다. 그리고 한번 더 실패하고 마지막 남은 한 번의 기회에서 그 동작을 어설프게 성공했다. 원장님은 내가 겁이 없다고 했다. 안되면 더 해보려고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요가 수련실은 나에게 너무나 안전하고 사랑스러운 공간이라 그런 무모한 용기가 생긴 것 같다. 발가락이 하필 걸으면 걸을수록 아픈 부분을 다쳐서 한라산 등반을 포기했다. 사실 그냥 가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가지 말라고 걱정해줘서 고마운 마음에 가지 않기로 했다.
이번주 금요일은 처음 해보는 것이 많았다. 가을의 제주를 가는 것도 처음이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의원도 가봤다. 한의원에 가면 한약 냄새가 진하게 나면서 전통적인 분위기에 벽에는 한문이 잔뜩 쓰여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병원이랑 다를 게 없었다. 한의사 선생님이 같은 요가원을 다니는 분이라 더 반갑고 좋았다. 그분과 평소에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침을 놔주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그게 너무 좋았다. 요즘 다시 글씨를 많이 써서 손목이 안 좋았다. 손목 치료를 받고 나니 확실히 사용할 때 덜 아팠다. 손목은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괜찮아질 때까지 꾸준히 다니기로 했다.
출근하고 정신없이 바빴다. 정시 퇴근을 위해서 점심도 거르고 일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안이 등장해서 정시퇴근을 못했다. 약간 초조해졌다. 학교에서 김포공항으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그 버스를 탔다. 아직 다른 직장인들의 퇴근시간보다는 이른 시간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엄청 막혔고 그 버스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려서 지하철이라도 타야 하나. 만약에 비행기를 놓친다면 무엇부터 해야 하나. 그냥 가지 말고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놓치면 제주도를 못 가는 게 내 운명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하고 창밖을 구경했다. 원래 걸리는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공항에서 수속을 밟고 게이트에 도착하고서야 내가 시간을 착각하고 엄청 빨리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행기 시간과 내가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변함이 없는데 그때와 지금의 마음이 너무나 다른 게 웃겼다.
8시쯤 제주에 도착했는데 마땅히 갈 식당이 없어서 예전에 유비와 갔던 채식 옵션 해장국집에 갔다. 휴무였다. 유비에게 전화했더니 밥해놓고 기다린다고 했다. 거의 10시가 다 되어서 유비네 집에 도착했다. 유비는 고산 시장에서만 살 수 있는 두꺼운 면의 고산 국수로 볶음 국수를 만들어 줬다. 유비는 손이 커서 2인분이 아닌 것 같은 2인분의 국수를 만들었다. 다 먹을 자신이 없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다 먹었다. 유비는 그동안 지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고 나도 그동안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추석 선물로 온누리 상품권을 줬더니 유비가 나한테 세 번 절했다. 졸려서 자고 싶다고 했더니 유비가 다른 방에 이불을 깔아줬다. 나는 혼자 자는 거 지긋지긋하니까 같이 자고 싶다고 해서 유비방에 같이 잤다.
너무 잘 잤다. 창문을 열고 바다도 보고 지나가는 고양이들도 봤다. 어제 10만 원어치 장을 봐온 유비의 주방에서 바나나를 먹고 공정무역 코코아도 마셨다. 또 행복하다고 숨 쉬듯이 말했다. 11시에 유비의 친구 자윤이를 만나러 앤드유 카페에 가기로 했다. 앤드유에 가는 길에 유비네 동네 주민을 만나 그분의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타려고 한 버스를 놓쳤다. 그다음 버스를 타고 내려서 길가에 꽃들을 구경하느라 더 늦었다. 우리는 서로 "아, 안되는데. 우리 늦었는데. 빨리 가야 하는데!" 이러면서 "와! 저 꽃봐. 너무 예뻐."라면서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리고 앤드유에 가서 자윤이를 만났고 자윤이랑 셋이서 애프터눈티와 브런치를 먹었다. 밥을 다 먹고 근처 바다 산책을 했다.
자윤이는 30분 뒤에 공항으로 떠난다고 했다. 수영을 못하는 자윤이에게 발만 담가보자고 다 같이 바다에 발을 담갔다. 날이 너무 좋아서 수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비는 자윤이에게 비행기 취소하라고 했고 자윤이는 비행기를 취소하고 우리와 놀기로 했다. 근처 협재해수욕장으로 가서 수영을 했다. 가을이니까 수영을 못할 줄 알고 수영복을 안 챙겼는데 스포츠브라를 입고 있어서 그냥 대충 벗고 수영을 하고 놀았다. 유비와 내가 자윤이 발을 하나씩 잡고 배영을 해보도록 도와줬다. 꽤 깊은 곳으로 들어와서 다시 해안가로 나가려는데 유비가 해맑은 표정을 하고 자윤이를 놔두고 혼자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유비가 손을 놓자 놀란 자윤이는 몸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자윤이가 힘을 주면서 발버둥 치니까 나도 당황하고 가라앉으면서 물만 계속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비를 부르면서 도와달라고 했다. 유비는 웃기만 했다. 우리가 장난치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물을 계속 먹으면서 자윤이를 들어 올리면서 몸에서 힘을 빼라고 했고 나중에 눈치챈 유비가 자윤이가 발을 내딛을 수 있는 바위 위치를 알려줘서 자윤이를 그곳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겁이 난 자윤이는 해안가 근처로 갔고 나랑 유비는 좀 더 수영을 하고 다 같이 올라와 바위에 몸을 말렸다. 따뜻하게 데워진 검은 현무암에 누워있었더니 잠깐 잠이 들었다.
집 근처로 돌아와 유비는 배고프다고 밥을 먹겠다고 하고 자윤이는 샤워하고 싶다고 집으로 갔다. 나는 갈 때마다 닫혀있어서 못 가본 동네 카페 메리오가닉에 갔다. 오가닉 제품도 팔고 밀랍초 공방도 같이 운영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이것저것 사고 싶은 차나 물건들도 구경하고 토종 생강 라떼와 바나나케익을 주문했다. 메리오가닉 사장님과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유기농에 대한 가치관이 너무 닮은 점이 많아서 사장님도 우리가 비슷한 것 같다고 하셨다. 채식 지향이나 환경적으로 채식이 더 나은 선택지가 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논비건을 선택하는 것도 나와 비슷했다. 그래서 밀랍초를 만드신다고 했다. 환경에 대한 이야기나 채식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점점 이야기하다 보니 허브에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도 발견했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유비와 자윤이가 왔다. 유비는 나에게 이러고 있을 줄 알았다고 사장님이랑 금세 친해져서 수다 떨고 있을 줄 알았다고 했다.
친구들과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친구들이랑 요가 이야기를 하는데 사장님은 우리의 이야기를 듣다가 예전에 요가 강사를 하셨다고 했다. 인도에 지도자 자격증을 수료할 수 있는 요가원 정보도 알려주셨다. 내가 베이킹에 관심이 있다고 말씀드리자 제주 귤로 만든 르뱅(천연발효종)을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그날 만든 깜파뉴도 먹어보라고 주셨다. 사장님이 만든 깜파뉴에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이런 빵을 내 손으로 만들 수 있으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았다.
메리오가닉에는 차도 판매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차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이트티도 있어서 약간 운명 같고 충격받았다. 사장님이 블렌딩 하면 좋다고 추천해주신 카다멈을 샀다. 아주 작은 병에 아주 조금 담긴 양이 만원이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비싼 향신료라고 한다. 제일 비싼 향신료는 샤프란인데 두 번째는 뭘까 궁금해만 했다. (귀찮다. 누가 검색해서 알려주라!) 한참 수다를 떨다가 마감시간이 지나버렸다. 나는 그날 완전 진상손님이었다. 너무 아쉽고 이제 나는 카페를 영영 이용할 수 없으니까 브라우니도 먹고 가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유비는 집에서 락앤락 통을 가져와서 브라우니를 잔뜩 샀다. 너무 즐거웠고 감사해서 이 마음과 여운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비가 메리오가닉 사장님께 저녁을 대접하면 어떻냐고 제안했다. 자기는 말하기 부끄럽다고 나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했다. 나는 다시 메리오가닉에 가서 사장님께 "저희 유.기.농.현미밥에 저녁 해먹으려고 하는데 같이 드실래요?"라고 여쭤봤다. 뒤에 일정이 있으시다고 했다. 유비는 엄청 아쉬워했다. 그리고 내가 여쭤볼 때 유기농을 강조했다는 게 웃기다고 했다. 다 같이 옥상에 가서 노을을 구경했다. 금방 저녁이 되었고 반딧불이가 빙글빙글 도는 것을 구경했다. 자윤이랑 나는 오늘 처음 만났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유비 칭찬도 많이 했다. 유비가 우리를 불러서 왜 저녁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냐고 약간 화가 났다고 했고,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짧았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유비는 이제 괜찮다고 우리의 사과를 받아주고 그때부터 같이 저녁을 준비했다. 나는 숙주를 삶아서 무침 반찬을 만들었다.
김치찌개와 시금치와 숙주 무침. 그리고 화룡점정 김자반. 아보카도 샐러드를 먹었다. 유비는 요리 천재다. 유비를 모르는 내 친구들도 내가 하도 많이 말해서 유비가 요리 천재인 건 다 안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나른해졌다. 유비는 기타를 치고 자윤이는 챙겨 온 노트북으로 게임을 했다. 자윤이는 메이플스토리를 하는데 내가 초등학교 때 해보던 게임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도 신기했다. 나도 학생들은 상담할 때 게임 이야기도 많이 하는데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게임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었다. 자윤이는 무슨 과외를 하듯이 이건 뭔지 저건 뭔지 나에게 설명해줬다. 고개는 열심히 끄덕였는데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
11시가 조금 넘자 졸렸고 나는 "애들아 나는 눈만 감고 있을게."라고 말했고, 유비는 자윤이에게 "쟤 저러고 잔다. 겁나 잘 자."라고 설명해줬다. 진짜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자다가 잠깐 잠결에 유비의 기타 소리와 자윤이가 "벌써 한시 넘었어. 진짜 자자. "라고 이야기한 것을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평소처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명상을 하고 차를 마시면서 바다를 봤다. 유비는 요즘 유기견 입양 홍보를 하러 다닌다. 그래서 아침 일찍 나갔다. 자윤이는 내가 일기를 반 정도 쓰고 있을 때쯤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어제 먹다 남은 김치찌개에 밥을 먹자고 라면사리를 넣었다. 그리고 비양도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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