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을 느낄 여유가 없어서 애써 여운을 없애려고 했지만 부질없이
길고 긴 여운을 남긴 영화
몇달 전 예고편에서 노을이 아주 예쁘길래 퇴근하고 평일에 봤는데 지인이 보고싶다고 해서 또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또 봐도 좋았던 영화였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2번이나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이 영화로 3관왕이 된 최초의 아시아 여성 감독이라고 한다.
사실 스토리는 먹먹하고 안쓰럽다. 하지만 아름다운 자연을 큰 화면으로 봐야하게 때문에 영화관에서 봐야 할 영화이다.
경제 위기로 폐허가 된 열악한 도시 엠파이어에 겨울이 찾아오자 일자리마저 잃은 주인공 펀은 왜인지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아마존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데 그 일마저 끊기자 너무 춥고 돈도 없어서 친구가 권해준 노마드들이 모여있는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곳에는 집없이 캠핑카에 의지해서 서로를 도와주며 살아가는 노마드들이 가득했다. 제목처럼 노마드 천국이다. 그곳에서 캠핑 생활 꿀팁, 당근마켓을 열고 서로 밥도 나눠먹고 캠프파이어도 한다. 캠핑 인생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제각각. 거기서 펀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저씨도 나타나는데 펀은 또 왜인지 아저씨에게 끌리면서도 철벽을 치고 노마드들 속에 있다가도 이내 혼자가 된다. 스스로 남겨지는 걸 선택하는 펀은 자발적이라고 하기에는 쓸쓸해보였다. 남편을 잃은 상실감이 뒤섞여서 혼란스러워보이는 펀이 지인은 안타까웠다고 했다.
펀이 아무대나 바지를 내리고 용변을 보는 모습이 우리 아빠를 생각나게 했다. 우리 아빠는 산 사나이(?)라서 산에 자주 가는데 산에 자주 가는 만큼 자연 속에서 용변을 자주 본다. 아빠는 산에서 용변을 보면 기분이 그렇게 좋다고 했다. 나도 몇번 해봤는데 '그렇게'를 빼고 좀 기분이 묘하고 좋았다.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펀의 아버지가 물려준 빈티지 접시를 아저씨가 깼을 때, 그리고 펀이 완전한 캠핑 생활을 결심하면서 창고에 있던 짐을 다 처분했을 때 소유에 대해 한번 더 생각했다.
그리고 스웽키라는 할머니도 그랬다. 스웽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할머니이다. 스웽키할머니는 마지막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 않고 좋았던 기억이 있는 곳으로 떠나기 위해 캠핑 트립을 시작했다. 캠핑카 페인트 칠도 꼼꼼하게 한다. 나라면 곧 죽으니까 대충 타고다닐 것 같아서 정성스럽게 캠핑카를 보수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할머니는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나눠주기도 한다. 죽을 날을 안다는 것이 이런 좋은 점이 있는 것 같다. 나도 내가 얼마동안이나 더 살 수 있는지 안다면 내가 아끼는 물건을 그 동안 나눠줄 것 같다. 펀은 남편을 병으로 먼저 보내본 경험이 있어서 스웽키 할머니에게 더 마음을 쏟은 것 처럼 보였다.
노마드들은 서로 헤어지는 인사를 할 때 Final goodbye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 인사 대신 See you down the road라고 말한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 헤어짐이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가 영화 곳곳에 박혀있다.
UB 생각이 많이 났다. UB가 일하던 협동조합 겸 카페에 페인트칠 하는 작업을 도와준 적이 있다. 옷에 페인트가 뭍을 걸 예상하고 버려도 상관없을 옷과 신발을 걸치고 갔다. UB는 내 옷을 보더니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옷이라고 했다. 그때 본 구겨지고 낡은 UB의 운동화는 정말 강렬하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UB는 아직도 그 운동화를 신고 있다.) 나는 UB의 운동화보다 멀쩡해보이는 내 운동화와 옷들이 참 부끄러웠다. 지금은 아니고 그때는 그랬다. 방랑자라 불리며 캠핑카에서 사는 영화 속 인물들이 다 UB같아 보였다. 아무도 없는 냇가에서 나체로 물속에 누워있는 장면에서도 UB가 생각난다. 지금 UB는 제주에서 살고있다. 여름에 제주에 가면 UB 꼭 하루에 한번 이상 바다수영을 한다. 우리는 특히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좋아하는데 그곳에서 종종 UB는 속옷이나 수영복을 벗어보라고 한다. 정말 기분이 남다르고 좋다고 했다. 그렇게 진짜 자연의 일부로, 자연으로,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순간은 너무 짧다. 그 찰나의 순간을 잘 붙잡고 살아야겠다.
과연 산다는 건 뭘까. 나도 펀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수 있을까. 그게 자의로 아니면 타의로 일지가 중요할까.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중요한게 아닌가. 불안정한 노동을 한다는 것은 자유의 댓가인가. 아니면 내 삶이 자본주의에 종속되는 족쇄인가. 영화를 통해 누군가의 삶을 구경하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영화인 것 같다. 예전에 만난 내담자가 생각났다. 그 내담자는 하루에 100만원 이상을 썼다. 세상이 우숩고 돈이 최고라고 했다. 그가 쓴 100만원은 누군가에게는 다른 가치일 것이고 뭐가 더 가치있다는 판단은 내 주관이라는 생각도 했다.
볼 계획이라면 영화관가서 큰 스크린으로 보자. 자연이 정말 미쳤다. 사람들은 다른 생김새처럼 캠핑 트립을 떠난 이유도 제각각이고 순간의 선택이나 상황들도 전부 제각각이었지만 자연은 늘 그 곳에 있었다. 그리고 아무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그들를 위로해준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마음이 먹먹하긴 했지만 아름다운 자연에 마음을 빼앗겨서 다른 것들에 대한 마음은 금방 증발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펀이 결혼식에서 낭송했다던 시를 우연히 연속으로 마주친 사람에게 들려주는 장면에서부터 눈물이 났다. 이 시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번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여름이라는 계절에 비유한 시이다. 나는 사랑도 좋아하고 여름도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 시가 내 취향을 정면으로 저격해버렸다.
소네트 18번 :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의 전문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까?
아니, 그대는 여름보다 더 사랑스럽고 부드러워라
거친 바람이 오월의 꽃봉우리를 흔들고
우리가 빌려온 여름날은 여름날은 짧기만 하네
어떤 날은 하늘의 눈이 너무 뜨겁게 이글대고
그 황금빛 가득한 그 얼굴이 흐려질 때도 많네
그러나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속에서 시들고
우연에 혹은 자연의 계획된 이치 때문이건 빛을 잃지만
그러나 그대의 여름은 시들지 않으리
그대는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리
죽음도 그대가 제 그늘속을 헤멘다고 자랑하지 못하리라
그대는 영원한 운율속에 시간의 일부가 되리니
인간이 숨을 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이 시는 살아남아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봄에 봤는데 여름에 다시 보고 더 좋았던 영화
집값에 내 삶을 묶어두지 말라고 말해주는 듯한
아주 작고 소중한 집에 살고 있는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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