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빠가 어제 은퇴를 하셨다. 영상통화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통화하는 내내 웃었고, 그 웃음에 씁쓸함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아빠는 사실 좀 우울하다고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오빠와 나에게 잘 자라주어 고맙다고 했다. 나도 아빠한테 사랑으로 키워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먹먹한 여운이 남았다. 거의 한 시간 동안 통화했는데도 부족한 건지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걸 아빠한테 구구절절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카톡을 보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길게 보낸 카톡은 시간이 지나면 읽을 수 없다. 그래서 블로그에 기록해두려고 한다.
카톡 내용
책에서 봤는데 퇴직 후에 몸이 가라앉고 쉽게 화가날 수 있대. 피해의식이 생기기도 하고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질 수도 있고.. 보통은 그 무기력을 우울증이라는 병으로 보는데, 사실 그건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순하게 수용해야 할 삶의 중요한 감정이래. 그 무력감은 은퇴 이후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생긴 게 아니야. 오히려 퇴직 후에도 여전히 의욕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 걱정해야지.. 마치 방부제를 많이 넣어서 썩지 않는 햄버거처럼. 그런 관점에서 퇴직 후 우울과 무기력은 반드시 필요한 감정 반응이고 건강한 신호라는 거야. 아빠가 나랑 방금 전화하면서 우울하다고 했을 때 눈물이 핑 돌았어. 그리고 감사하다고 생각했어. 솔직한 감정을 나에게 나눠줘서 고마워. 한편으로는 할 수 있다면 그 우울을 내가 가져가서 처리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우리나라의 대부분 직장생활은 한 인간이 입체적인 모습과 다양한 역할로 살기 어렵지. 회사가 필요로한 도구로 살아온 시간이고, 그래서 사회적 성공이란 자기 억압의 결과일 수 있겠다 싶어. 그런 삶의 끝이 은퇴인데 이건 마치 감옥에 오래 있다 출소한 기분일 거잖아. 결국 비로소 내 삶으로 돌아오는 순간일 텐데. 장기수로 살다가 막 출소한 사람에게는 세상이 아득하고 두렵겠지?
그 무기력과 우울은 지금은 털석 주저앉아 내 삶을 먹먹하게 돌아봐야 하는 때라고 알려주는 신호야. 그것들을 잘 음미하면서 진짜 삶에 대한 현실감각이 들어올 거고. 내가 누구인지, 그간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생각하고 가족들이 새삼 실감 나게 눈에 들어오기도 한대.
축하해 아빠. 절름발이 같은 도구적 삶에서 벗어나 드디어 진짜 나를 만나는 축복의 시간이 시작됐어.
얼마동안 우울하고 무기력하기도 하겠지만 그 감정을 도움판으로 해서 아빠의 빛났지만 잃어버렸던 삶의 반쪽을 찾을 수 있길 바라. 그 반쪽에 언제나 우리가 함께하길 바라며, 너무나 멋지고, 자랑스럽고,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자인 아빠. 아빠의 은퇴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응원합니다. 아빠의 사랑과 희생으로 이렇게 잘 키웠는데 여전히 어리광 부리는 딸이지만 늘 사랑한다고 해줘서 고마워요. 오늘도 내일도 아빠를 사랑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딸랑구가 상담교사라는거 잊지 않았죠? 오늘처럼 서로 감정을 나누며 의지가 되는 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저는 자러 갑니다. 사랑해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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