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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travel/Jeju

바다 수영::제주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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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반쯤 일어났다. 나가면 바로 바다가 보인다. 현무암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일출을 바라봤다. 명상이 따로 필요 없다. 그냥 보고 있는 그대로 느끼면 그게 명상이었다. 그만 돌아가려는데 세 마리의 개들이 해맑은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너도 같이 놀래?'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개들을 따라가니 신재생에너지 연구원 같은 곳에 벤치가 많았다. 개들을 내 주위를 맴돌며 잔디에서 뒹굴고 나는 벤치에 벌러덩 누워서 일기를 썼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한참을 누워있다 보니 개들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고 해는 부지런하게 올라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ub가 아침으로 만들어준 두유요거트를 먹었다. 향을 피우고 숙소 앞 평상에서 ub가 좋아하는 재즈 보컬 허소영의 노래를 들었다. 책을 읽다가 일기를 썼다. "아 행복해"라는 말만 반복했다. ub는 "나도 이렇게 행복한데 넌 오죽하겠니. "라고 했다. 정원에 크고 작은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몽글몽글하고 울렁울렁한 설렘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ub가 말해줬던 'butterflies in my stomach'이 생각났다.

바쁘게 살다보니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ub에게 자꾸만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ub는 그 마음을 잘 안다고 했다. 평상에 햇빛이 서서히 자리를 차지하길래 나갈 준비를 했다.
우선 수영복 위에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평대리 해수욕장에 갔다. 작은 해변에 사람이 적어서 좋았다. 모래 위에 돗자리를 대충 깔고 옷을 훌러덩 벗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바다에서 놀아보니 아침바다가 제일 예쁘다. 가장 투명하고 가장 아름답다.

ub는 한달째 제주에서 살고 있다. 오늘이 제주도에 내려온 이후로 가장 날씨가 좋다고 했다. 나는 "내가 와서 그래."라고 했다. 내가 가면 날씨가 좋아진다고 우기는 편이라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이 날씨 요정이라고 불러준다. 이번에도 날씨 요정이 되었다.

ub가 자꾸 접영을 알려달라고 했다. 알려주긴 알려주는데 "나도 잘 못하지만"이라는 말을 꼭 앞에 붙였다. ub의 얼굴을 보니 대답을 안들어도 알 것 같았다. '너 정말 못하는구나.'라고 ub의 눈이 입대신 대답했다. 수영보다는 물장구가 더 어울리는 팔짓과 발짓을 하다가 스노클링 장비를 챙겨서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 예쁜 바다 생물들이 파도가 만든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슴을 닮은 물고기를 봤다. (비건들은 물'고기'를 '물살이'라고 부른다.) 갈색 바탕에 더 짙은 갈색의 줄무늬를 가진 물살이었다. 물이 무서워서 수영을 배운 터라 발이 닿지 않은 곳은 아직 잘 가지 못하지만 스노클링 장비 덕분에 깊숙한 곳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평대리 해변에는 미역이 엄청 많다. 연두색의 미역들이 너무 예뻐서 만져보다가 몇개 주워서 ub의 몸에 붙여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역으로 감싸주고 신나게 웃다가 사진도 찍었다. ub는 그 사진을 인스타 프로필 사진으로 바꿨고 이번 여행 최애 사진이 될 것 같다고 말해줬다.

의식의 흐름대로 사는 ub와 그러려고 제주에 온 나는 어린아이처럼 놀았다. 미역을 가지고 놀다가 갑자기 모래에서 요가를 했다. 물구나무서기를 하다가 넘어진 ub는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서 바다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굴렀다. 바다에 가만히 둥둥 떠있으면 몸이 따뜻해졌다가 시원해졌다. 수영장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감각들이었다. 제주바다는 양양 바다와는 다르게 초록빛이 더 많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하늘색과 초록색이 뒤섞인 바다를 사랑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바다에 있었다.


잠시 정자에서 몸을 말리고 비건옵션이 되는 가정식 식당에서 고사리 들깨탕을 먹었다. 고사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제주 고사리는 비린 맛도 없고 식감도 너무 좋아서 국물까지 다 먹었다. 제주에서 자랐으니 이 고사리들도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밥을 먹고 ub는 또 수영을 하고 나는 정자에서 낮잠을 잤다. 나의 코 고는 소리와 누군가 나를 깨우는 소리에 깼다. 제주 할머니가 나에게 어디에서 왔냐며 말을 걸었다. 할머니는 원래 해녀였는데 뇌수술을 세 번이나 받아서 이제 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아주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계셨고 때마침 나에게 온 ub는 그 모자가 탐이 난다고 했다.

 

 


비건 빙수를 먹으러 갔다. 하필 오늘 쉬는 날이었다. 아쉬운대로 바로 옆에 있던 카페에 가서 당근주스를 시켰다. 나는 책을 읽고 ub는 바로 앞 정자에 가서 낮잠을 잤다. ub가 정자에서 자고 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여기 관광객들 와서 쉬다가는 곳인데 여기서 이러고(비키니만 입고 자서 그렇게 말한 걸로 추정) 자면 어떡하냐고 소리쳤다. ub는 "저도 관광객인데요?"라고 했고 그 얘기를 들은 나는 한참을 웃었다.


 

 


자전거를 빌려주시기로 한 카페에 걸어갔다. 가는 길에 소품샵에 들러서 마음에 드는 인센스를 샀다.
카페에 가기 전 ub는 먼저 가서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보면 자기가 딱 좋아할만한 카페라는 생각이 들 거라고 했다. 너무 아름다운 카페였다. 예쁜 꽃들이 규칙 따윈 없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바다가 잘 보이는 그 카페에서 비건 인도커리를 주문하고 석양을 보면서 책을 읽었다. 커리는 카페의 분위기처럼 포근하고 섬세한 맛이 났다. 골고루 먹으라는 부모의 마음처럼 각종 야채가 올라가 있고, 피클도 종류가 4가지나 있었다. 사장님은 이렇게 많이 주셔놓고 밥이 부족하면 말하라고 하셨다. 너무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행복하다고 100번 정도 말한 것 같다.


 

 



밥을 먹고 석양을 더 잘 보고싶어서 밖에 나가 앉아서 주인아저씨와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 아무 하고나 잘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파트 단지에서 반상회를 하면 내가 따라다녔다고 엄마가 말해줬던 게 생각났다. 대학생일 때도 교수님들과 어울리며(?) 밥과 차도 많이 얻어먹고, 비 오는데 우산이 없다고 하니 다음 강의실로 운전해주시는 서비스를 받아본 적도 있다. 누군가 나에게 이야기를 잘 들어줄 것 같이 생겼다고 한 적이 있다. 주인아저씨는 6년 전에 제주에 내려왔고 신나게 놀다가 심심해져서 5년 전에 카페를 차렸다고 했다. 인도커리는 따님이 인도에서 배워와서 아저씨께 알려주신 거다. 밖으로 보이는 가까운 불빛은 한치 배이고 먼 불빛은 갈치 배라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7시 반쯤 ub는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숙소로 돌아와보니 내 등은 새빨갛게 익어있었다. ub가 소시지 같다고 했다. 따갑고 쓰라렸다. 옷 입기도 힘들었다. 내일은 바다수영을 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ub가 알로에 젤을 발라주었다. 알로에 젤이 마르면 또 발라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호사를 누렸다. 하지만 바르면 바를수록 내 등은 불타고 있었다. 살갗은 따갑고 손발과 머리는 춥고, 행복한데 아픈 게 마치 바닷속 같았다. 결론은 너무 행복.

You deserv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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