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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travel/Jeju

20 여름방학::제주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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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급하게 공항에 갔다. 뭐든 조금씩 느린 나는 빨리 해야 할 때면 어딘가 고장 난 사람 같다. 무사히 탑승하고 앉자마자 시를 읽었다. 같은 시집을 10년 동안 여러 번 읽고있다. 그 시집만큼 좋아해서 사놓고 읽다가 선물하고, 다시 사놓고 선물하고를 반복했던 시집도 있다. 여러 사람에게 선물했던 그 시집을 다시 사서 비행기 안에서 읽었다. 이 시들이 마법의 주문처럼 나를 맴돌았나 보다. 내생각인줄 알았던 것들이 시의 문장이 되어 있었다. 또 청승맞게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

숙소로 가는 길에 ub의 일기를 읽었다. 대리만족이었다. 근데 이제부터 아니다. 이제부터 직접만족이다. 좀 걷고 싶어서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을 20분 동안 걸었다. 마냥 걷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막상 걷다 보니 많이 무서웠다. 그것이 알고싶다를 너무 자주 봤는지 꼭 이런 시간에 이런 길에서 연쇄강간살인사건이 일어나던데 싶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 무서움은 내 안에서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db이에게 전화를 했다. 10년 동안 읽은 그 시집처럼 10년 동안 한결같이 다정한 친구 db덕분에 무서움을 지우고 대화로 채워진 길을 걸었다.

db에게 지금 내가 걷는 길이 얼마나 시골스러운지 설명했다. 걷기 시작하니까 동네 개들이 왕왕 짖었다. 한마리가 짖기 시작하니까 주변에 있던 다른 개들이 자극을 받아 같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귀여운 생명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그 짖음이 나를 반겨주는 인사 같아서 좋았다고 얘기했다. 한참 걷다가 마스크를 계속 쓰고 있었다고, 언제부터 마스크를 써도 쓴 줄도 모를 만큼 이 삶에 적응해버렸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마스크를 벗으니까 달큰한 풀냄새, 흙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나는 왜 이런 길을 걷다가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는 걸까 질문했다. db이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가 답했다.(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다. 미안해 db) 그 알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중학교 2학년 체육시간에 나를 포함한 8명의 여자아이들이 진실게임을 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중 7명이 최소 성추행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거의 다 와서 네 덕분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말했고, db이는 그래, 잘 쉬다오라고 했다.

ub는 날 보자마자 꼭 안아줬다. 짐을 풀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을 끄고 누웠다. ub는 피곤했는지 금방 잠이 들었다. 누군가의 숨소리를 들으니까 마음이 편안했다. 꼭 우주랑 같이 있는 것 같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그 자체가 주는 안도감. 행복하다. 앞으로 질리도록 많이 할 말.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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