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진다는 것
고운기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고운기,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창비, 2001>
부장님이 오늘도 시 한편을 선물해주셨다.
사실 나도 시를 좋아한다고, 어느 순간 시를 읽던 삶이 흐려졌다고 말씀드리자
부장님은 "시를 읽는다는 건 꽃 한송이를 보는 것과 같아요. 시 한편에 책 한권이 들어있죠."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며칠 째 내 마음 속을 부유하고 있다. 참 좋다. ㅎㅎ
그리고선 자주 시 선물을 주신다.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가을이다.
되찾은 가을에 시를 많이 읽고, 또 바뀌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를 맡겨 본다.
아끼는 오래된 내 구두
이 구두를 보내지 못하고 가슴아파하고 있던터라 이 시가 더 와닿았다
오래되고 그래서 나를 잘 아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다.
그 오래된 것들 속에서 나는 안심하고 안온했다.
때가 되어 나를 떠나야 하는 것들을 붙들고 아파했는데
가는 때를 받아들이는 마음도 중요한 것 같다
순환과 흐름대로
멈추고 바꾸어야 할 때
고맙다고 인사하고 보내줄 수 있는 용기와
과거에 머무르려 애쓰지 말고
그것들 속에서 나를 맡기며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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